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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로 본 세상이야기

새해원단에 걱정되는 것들


기자 시절의 취재노트를 다시 들여다본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말기적 탄압이 정점을 향해 치닫던 1986년 봄. 새 학기가 시작되자 이미 그 전 해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으로 탄력을 받은 학원가는 '전방입소 반대투쟁'으로 술렁대기 시작했다. '전방입소'란 5공정권시절 대학생들이 반드시 이수해야했던 군사훈련과목의 하나로 1학년때는 문무대, 2학년때는 전방부대에 1주일여씩 입영해 현역군인처럼 받는 훈련을 일컫는다. 당시 학생운동권은 전방입소 반대를 주요 투쟁목표로 내세웠는데 그해 4월28일 서울 신림사거리 인근 빌딩 3층 옥상에서 서울대 김세진과 이재호등 두 학생이 "전방 입소 결사반대, 반전 반핵 양키 고홈"을 외치며 시너를 온 몸에 뿌린 채 시위하다 경찰이 진압하려하자 분신했다. 중상을 입은 이들은 이내 숨지고 말았다.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의 분신사건 이후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학생이 집단으로 분신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필자는 불길에 휩싸인 두 학생이 외치던 절규를 잊을 수 없다.

그해 10월28일 전두환정권은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발족식이 열리던 건국대 교정에 경찰 8,500여명을 투입, 학생 1,525명을 무더기로 연행했다. 이날 경찰은 학생들이 농성중인 학생회관 상공에 헬기까지 동원했는데 이는 마치 영화속의 군사작전이나 다름없었다. 늦가을 국화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캠퍼스는 무참히 유린됐다. 경찰은 유사이래 최대규모인 1,290명의 학생을 구속했다.

한 해가 뒤바뀐 1987년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 숨졌다. 경찰은 그 유명한 "탁 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둘러대며 쇼크사라 처음 밝혔지만 곧 경찰의 물고문에 의한 타살임이 밝혀졌다. 바로 이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봄 학원가가 '독재타도, 직선쟁취'등을 주장하며 다시 술렁대자 전두환대통령은 '4.13호헌조치'를 발표했다. 그러나 6월9일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데 이어 20여일 계속된 6월항쟁으로 5공정권은 막을 내렸다.

역시 노태우정권이 막바지로 내닫던 1991년4월26일,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학교앞에서 시위하다 경찰특수진압부대인 '백골단'에게 무참히 맞아 숨졌다. 이를 계기로 그해 학원가는 학생들의 분신항거와 시위가 잇달았다.

이상은 전두환정권 이래 민주화를 열망하던 학생과 이를 진압하려던 경찰이 물리적으로 충돌하면서 빚어진 비극적 사건을 간추려본 것이다. 이 사건들을 되돌아보면 몇 가지 특징을 읽을 수 있다. 첫째는 비민주적 억압정권이 공권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려 할 때마다 비극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대개가 정권의 말기에 사건이 터졌고 그 정권은 이 과다한 공권력남용이 빌미가 되어 종언을 고했다는 점이다. 셋째는 정권의 의지를 간파한 경찰 수뇌부의 과잉충성이 발단이 됐다는 사실이다.

신년벽두에 경찰의 과잉 농성진압과정에서 철거민 등 6명이 숨졌다. 다시는 이 땅에 빚어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됐던 국민과 공권력의 갈등에 치여 국민, 그것도 가장 소외계층인 철거민들이 숨진 것이다. 이명박정권은 지난해 촛불시위가 잦아들자마자 '법과 질서'를 강조하며 공권력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이 슬로건의 비극적 결과가 철거민의 죽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건이 집권 2년차 초기에 벌어졌다는 점이다. 때문에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민들이 공권력의 이름아래 희생당할 것인지 생각만 해도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