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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권력형 비리와의 전쟁 - 심판의 선봉장 윤승용 더보기
유종필[관악구청장, 전 민주당 대변인] 1 그램의 생각으로 1 톤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 1 그램의 생각으로 1 톤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 윤승용은 나와 한국일보 입사 동기이다. 내가 한겨레 창간에 참여하여 한국일보를 떠났기 때문에 그와 함께 지낸 기간은 몇 년 되지 않는다. 그 앞뒤로 그와의 인연도 결코 적지는 않지만, 내가 이 ‘물건’에 대해 보증할 수 있는 기간은 함께 지낸 한국일보 초년병 시절이다. 사실 나는 사람에 대한 보증을 서는 데 적극적이지 않은 성격이기도 하고, 다른 기간은 더 적절한 분들이 보증을 할 것이라 들었기 때문에 내가 어설프게 나서지 않기로 한다. 나는 입사 초기 힘든 기자 견습에도 불구하고 한국일보의 자유분방하고 끈끈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우리가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내에서는 제법 쓸 만한 놈들이 많이 들어왔다는 평이 돌기 시작했다. 내가 볼 때도 .. 더보기
내 인생으로 들어온 언론 어린 시절, 사람들은 누구나 무엇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꾼다. 그것은 때때로 막연한 기억으로 사라지기도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대로 직업이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나와 언론의 인연은 그렇게 코흘리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생각해볼 수 있지만, 뒤돌아보면 그랬기에 현재의 내가 있었던 것 같다. 공짜신문이 가져다준 인생의 전환점 내가 막연하게나마 언론인(당시로서는 언론인이라기보다는 신문기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어린 시절부터였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은 어려운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신문을 구독했다. 당시 이리(현재의 익산시) 시내에서도 걸어서 30여분이나 걸리는 변두리였던 익산군 북일면 금강리 운용부락(현재의 익산시 금강동)에는 키 큰 미루나무에 안테나를 달아 겨우 소리.. 더보기
바야흐로 신 보도지침 부활?  필자가 한국일보 햇병아리 기자시절이던 1980년대 중반의 일이다. 통상 신문제작을 위한 편집국 부장단회의는 아침, 점심 직후, 오후 초판 마감직전, 초판 발행 직후 등 매일 네 번씩 열린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회의는 초판 마감직전인 오후4시 회의다. 이 회의에서는 1면 톱기사를 비롯한 주요기사의 배치와 기사제목 등 매우 민감한 신문제작 기조가 결정된다. 그런데 이 회의 석상에서 당시 모 편집국장은 항상 이상한 메모지를 꺼내들고 신문제작방향을 결정했다. 그는 회의가 끝나면 그 메모지를 국장석 메모함에 이를 보관했다. 이 같은 관행이 지속되던 1985년 가을, 특집과학부의 김주언 기자가 이 메모지의 정체가 궁금해서 몰래 이를 훔쳐봤다. 메모지를 훔쳐보던 김 기자는 놀라움과 분노로 달아올랐다. 메모의.. 더보기
위키리크스와 위기에 선 대북정책  요즘 라는 폭로전문 웹사이트가 새롭게 들춰낸 미국 외교문건 파동을 보면서 칼럼 한 편이 떠올랐다. 평소 다양한 현장 취재경험을 바탕으로 현상의 이면을 꿰뚫는 깊이 있는 칼럼을 써온 이영성 한국일보 부국장이 10월2일 한국일보 에 게재된 란 문제적 글이 바로 그것이다. 이 부국장은 이 글에서 1990년 10월 2일 독일 통일 공식 선포 전야제의 모습을 전하면서 분단 한국의 현실을 떠올린다. 그는 “(현재)철저한 대북 봉쇄로 북한의 경제난을 가중시켜 괴멸시키자는 노선도 그다지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 북한을 엄호하는 중국이 있기 때문이다”고 전제하고 “북한 급변사태 시 중국 군대가 진주한다면 속수무책이다. 독일 통일 때 결정적 키를 쥐고 있던 소련은 붕괴 직전이었고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열린 지도자였.. 더보기
헬렌 토머스와 기자정신 지난 주 말 미국 백악관 브리핑룸(기자실)의 헬렌 토머스 기자가 자신의 말 실수로 68년간 천직으로 여겨온 기자직을 떠났다는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가 아직까지 현역에서 활동 중이라는 사실에 놀라웠고, 평생을 '말과 글'을 다루며 살아온 그가 구설수로 은퇴했다는 점이 믿기지 않았다. 필자가 10여년 전 한국일보 워싱턴 특파원 시절 백악관과 대통령 선거 유세 현장에서 만났던 그는 8순의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는 여장부였지만 가까이서 보니 노쇠한 흔적이 역력해서 조만간 은퇴하겠구나 생각했었다. 그런 그가 아흔을 눈앞에 둔 오늘날까지도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게 존경스럽기조차 하다. 미국식 나이로 89세이지 사실 1920년8월4일생인 걸 감안하면 그는 한국나이로는 이미 아흔인 셈이다. .. 더보기
저는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전북 익산시 금강동 출생 익산 신흥초등학교 졸업 이리동중학교 졸업 전주고등학교 졸업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전북대 행정대학원 뉴리더스아카데미 5기 과정 수료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졸업(언론학석사) 동국대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 재학중 현 창조도시용인정책연구원 공동대표, 노무현재단 운영위원, 용인신문 객원논설위원, 시민주권 상임운영위원 *** 경 력 *** 1985년 한국일보 입사, 사회부, 전국부, 기획취재부, 정치부근무 워싱턴 특파원(1999년 8월 - 2002년 9월) 미국의회,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출입 사회1부장, 정치부장 1995년 한국일보사 노동조합위원장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수석부위원장 서울지역 신문노조협의회장 (주간)미디어오늘 창간이사 청년네트워크21 창립대표(30~40대 전문가중..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