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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걸어온 길/언론인 윤승용

내 인생으로 들어온 언론



< 내 인생으로 들어온 언론>

어린 시절, 사람들은 누구나 무엇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꾼다. 그것은 때때로 막연한 기억으로 사라지기도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대로 직업이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나와 언론의 인연은 그렇게 코흘리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생각해볼 수 있지만, 뒤돌아보면 그랬기에 현재의 내가 있었던 것 같다.
 

공짜신문이 가져다준 인생의 전환점
 
내가 막연하게나마 언론인(당시로서는 언론인이라기보다는 신문기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어린 시절부터였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은 어려운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신문을 구독했다. 당시 이리(현재의 익산시) 시내에서도 걸어서 30여분이나 걸리는 변두리였던 익산군 북일면 금강리 운용부락(현재의 익산시 금강동)에는 키 큰 미루나무에 안테나를 달아 겨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광석 라디오가 유일한 문화수단이자 언론창구였다. 그러다가 이웃 동네의 삼촌뻘 되는 분이 베트남전에 십자성부대원으로 참전했다가 무사히 귀국하면서 가져온 일제 소니 텔레비전이 유일한 영상매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 생각하면 엄청나게 바지런한 판촉사원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한 조간신문의 직원이 동네방네를 돌며 신문 구독을 권유했다. 우선 1년을 공짜로 보고 다음 해부터 돈을 내라는 것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실정법에 어긋나는 과잉판촉요원이었던 셈인데 우리는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는데·······’ 하는 심정으로 신문을 구독했다. 또한 한 술 더 떠서 그 신문이 함께 발행하던 소년신문도 구독했다.
어린 초등학생의 눈에 처음 보는 신문은 지식의 창고이자 상식의 보고였다. 나는 모르는 한자는 꼼꼼히 옥편을 찾아가며 신문을 정성껏 읽었다. 새벽에 일어나 대문 밖에 떨어져 있는 신문을 찾아와 처음 펼쳤을 때 풍기는 상쾌한 잉크 냄새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이후 눈을 뜨면 조간신문을 맨 뒤의 사설까지 꼼꼼히 읽는 습관은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신문을 보기 시작한 후 나의 학교생활도 크게 달라졌다. 요즘은 성격이 많이 바뀌었지만 어릴 적엔 무척 내성적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시절에는 담임선생님이 반장을 맡기자 “겁이나 못하겠다”며 울고 집으로 도망 온 적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신문을 정성껏 읽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제법 아는 체하며 떠들어대면 괜히 우쭐해지곤 했다. 특히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축구나 권투에 대한 새 소식을 내가 미주알고주알 떠들면 친구들이 귀를 쫑긋해하곤 했다. 자연스레 친구들은 체육 소식은 물론 일반 상식과 어려운 현안들에 대해 내게 묻는 게 하나의 관행처럼 돼버렸다. 선생님도 난감한 질문이 나오면 나에게 개인적인 견해를 묻곤 했다.

이 같은 생활을 계기로 난 막연히 ‘커서 언론인이, 특히 신문기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됐다. 특히 중학교 2학년 시절인 1972년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이어 열린 평양 남북조절위원회 대표단의 거의 절반이 보도진인 것을 보고 ‘언론인들이 무척 중요한 일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난 그 시절부터 구독하던 신문의 칼럼과 사설 중에서 눈여겨볼만한 것은 꼭 스크랩을 하기 시작했다. 유명인사가 쓴 칼럼뿐 아니라 기자들이 쓴 현장 칼럼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내가 스크랩했던 칼럼 파일은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학보로 시작한 ‘언론인’의 꿈
 
대학에 들어가자 많은 선배들이 서클 활동을 권유해왔다. 유신시대인 당시 서울대에는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불법 지하 의식화 서클이 왕성하게 활동 중이었다. 요즘 성가를 올리는 386세대의 이전 세대라 할 이들은 학내 서클 활동이 불법화하자 은밀한 방법으로 후배들을 모아 허름한 자취방에서 주간 세미나와 수시로 있는 멤버십트레이닝(MT) 등으로 사회과학공부 등을 하며 유신 군사독재를 타도할 방법을 모색했다.

나는 선배의 권유로 경제법학회(줄여서 경법이라 통칭했다)와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기독교 서클 중 진보적 단체인 총기독학생회, 그리고 역시 가장 진보적 대학생회가 활발하게 움직이던 기독교장로교 향린교회 대학생부 등에 적을 두고 서클활동을 해나갔다. 이어 초봄이 지날 무렵 대학교 신문인 서울대 대학신문에 신입 기자를 선발한다는 공고가 나자 나는 설레는 맘으로 “대학신문 기자를 하고 싶다”며 선배들과 상의했다. 당시 전주고 선배이자 국사학과 3학년생이던 김용흠형(현재 연세대 강사)에게 상의하자 김 선배는 “대학신문 기자도 좋지만 거긴 너무 저널리스틱한 데다 자칫 어용성에 빠질 우려가 높으니 차라리 인문대학보인 ‘지양’에 들어가서 일해보라”고 권유했다.

당시 대학신문은 학교 측에서 임명한 주간 교수가 사실상 편집권을 좌지우지하는 형국이어서 학생들의 진정한 의사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던 터였다. 대학신문의 비정상적인 운영행태를 파악하고 난 나는 비록 주간지이지만 서울대를 대표하는 신문에서 기자생활을 하고 싶은 생각을 깨끗이 접었다. 훗날 80년대 초반 학원자율화 조치가 취해지면서 대학신문은 명실상부한 ‘학생들의 신문’으로 환골탈태하긴 했지만 당시의 대학신문은 사실상 정부, 문교부 그리고 대학 당국의 일방적인 정책을 전달하는 어용매체에 불과했다.

난 대학신문 기자에의 뜻을 접고 인문대 학보사 ‘지양’에 들어갔다. 서양철학의 변증법 체계에서 나오는 철학용어인 독일어 Aufheben을 번역한 지양은 과거 서울대 문리대의 맥을 잇는다고 자부하던 인문대생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이고 낭만적 용어였다. 서울대 인문관 2동 308호에 위치하고 있던 지양 편집실은 영문과 등이 있는 3동과 철학과·국사학과 등이 위치한 5동 사이에 자리하고 있어 인문대의 반유신에 뜻을 같이하는 문제아(?)들의 집합소 비슷한 분위기였다.

당시 멤버로는 박승옥(불문과/시인, 노동운동가), 김영현(철학과/소설가), 감사인(국문과/시인, 동덕여대교수), 연성만(국사학과/사업), 고세현(국사학과/ 현 창작과 비평사 사장), 김용흠(국사학과/연세대 강사), 박일용(국문과/홍일대 교수), 윤언균(불문과/학술진흥재단 부장), 한철희(국문과/돌베개출판사 사장), 김명인(국문과/인하대교수), 안기석(철학과/동아일보 부장), 한흥구(국사학과/성공회대 교수), 유동환(독문과/도서출판 푸른나무 사장), 김윤택(국문학과/서울대 강사), 최민(국사학과/사업), 문용석(나우컴 대표이사) 등 각 과에서 학생운동의 리더 그룹에 속하는 재재다사였다.
 

학보가 아닌 지하유인물?
 
우리 문리대의 저 유명한 학보였던 ‘형성(形成)’지의 맥을 잇겠다며 열심히 기획하고 원고를 모으곤 했지만 어찌된 노릇인지 최종 편집책임자나 주요 원고청탁자들이 곡 마감을 앞두고 시위를 주동하거나 조직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는 바람에 제대로 창간호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형성은 1950년대로부터 1975년 문리대가 해체되고 인문대와 사회대 및 자연대로 분리될 때까지 단순한 학보로서의 기능뿐 아니라 주요한 고비마다 학생운동사의 진로를 제시하는 무게 있는 논문 등을 게재함으로써 큰 성가를 올린 학보의 고전이었다. 어떻게든 창간호를 내야겠다며 동분서주하던 우리는 그러나 엉뚱하게도 학보라는 책보다 지하유인물이라는 ‘신문’을 먼저 내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유신체제도 종말을 향해 치닫던 1979년 9월 초순 어느 날이었다. 2학기가 개강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때였는데 현 돌베개출판사 사장인 한철희 선배가 저녁에 좀 보자는 연락을 해왔다. 동향인 전북 임실 출생에 전라고를 나온 한 선배는 지금도 그렇지만 훤칠한 키에 하얀 피부를 갖춰 마치 도골선풍(道骨仙風)이나 다름없었는데 조용하면서도 자신에게 부과된 일을 훌륭하게 해치우는 성실성에 반해 난 그를 제법 따르는 편이었다.

한 선배는 매우 열띤 목소리로 유신체제의 부당성과 미국 등의 압력으로 조만간 박정희 군사독재는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설파했다. 한 선배는 이어 “그러나 군사독재는 거저 망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힘을 합해 싸워야 한다. 그런데 많은 국민들은 군사독재의 실상을 잘 모르고 있다. 우리가 독재의 실상을 알리는 지하신분을 만들어 학생과 시민들에게 돌리자”고 제안해왔다.

너무도 옳은 소리였지만 난 선배의 제의에 즉답을 할 수 없었다. 당시는 시위는 물론이려니와 학내외 유인물 작성 및 배포자는 무조건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구속과 제적을 당하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선배의 제의를 수락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결단이 필요했다. 난 “이틀만 말미를 달라”고 요청했다. 한 선배는 “좋다. 대신 가족들과는 절대 상의하지 마라”고 말했다. 가족들과 상의하다 그대로 가족에게 이끌려 군대로 사라진 친구들도 많았을 뿐 아니라 어떤 경우는 가족들이 경찰에 신고해 조직 자체가 와해된 사례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심각해졌다. 유신 독재의 종말을 좀 더 다가오게 하기 위해선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시골에서 나의 성공만을 기대하는 부모님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바로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내 학비를 대고 있던 형님에 대한 부담감 등에 꼬박 이틀을 고민했다. 그러나 비밀을 유지해야 했기에 누구하고도 상의할 형편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