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걸어온 길/언론인 윤승용

민주 언론의 깃발, 언론 노동조합

 

 
<민주 언론의 깃발, 언론 노동조합>
 
당시 우리는 매일 소모임을 계속하며 전의를 다지는 한편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나는 당시 서울 YMCA 시민중계실 간사로 일하는 대학 친구 윤석규(현재 민주당 안산단원을예비후보)에게 부탁해 우선 노동조합 결성식을 할 공간을 확보했다. D데이를 언제로 할 것이냐가 논란이었으나 동아일보에서도 은밀한 노동조합 부활을 추진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새삼 전의를 불태우면서 “이왕이면 노동조합 부활 첫 타자가 되자”고 결의를 다졌다.
 

노량진 조기축구회가 노조?
 
우린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서두르고 서두른 끝에 그해(1987년) 10월 29일 새벽 7시로 날짜를 정했다. 난 윤석규에게 부탁해 1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YMCA 친교실을 예약했다. 혹시라도 회사나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눈치 챌까봐 예약자도 가명으로 했고 사용목적도 ‘노량진 조기축구회 정기총회’로 정했다. 노량진 조기축구회는 당시 서울 노량진 장승백에 살던 내가 순간적으로 생각해낸 아이디어였는데 나중에 발기인들이 뒷풀이할 때 ‘노량진 조기축구회’를 줄이면 ‘노조’가 된다며 “절묘한 작명”이라고 가가대소했다.

다른 팀들은 편집국 소장기자들을 대상으로 보안을 유지해가며 창립대회에 동원할 인사들을 모아나갔다. 이 작업은 순식간에 50여 명이 뜻을 같이하기로 하는 등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노조위원장 인선작업은 난항을 거듭했다. 후보군 중 유력시되던 조성호 선배가 완강히 고사했기 때문이다.

조 선배는 “너희들의 뜻은 알겠으나 난 회사의 실력자인 이모 씨와 대학친구 사이이고 너무 연배가 높아서 어렵다”고 극구 사양했다. 당시 조선배는 나와 집이 같은 방향인 봉천동인데다 대학도 선배여서 자연스레 설득 책임 조장으로 내가 꼽혔다. 난 퇴근 때마다 청진동은 물론 장승백이에서 2차를 하면서가지 설득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결국 초대 노조위원장은 원점에서 검토됐는데 조성호 선배보다는 연배가 낮지만 민주언론에 대한 의지는 젊은 기자 못지않은 최해운 선배(전 뉴시스 사장)로 후보를 압축, 설득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업은 남영진, 김주언 등이 담당했다. 이미 D데이까지 잡아놓은 터여서 시일이 촉박했다. D데이를 이틀인가 앞둔 대 드디어 낭보가 날아들었다. 최선배가 결국 승낙했다는 것이다. 청진동 술집에서 마무리 준비를 하던 우리는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최해운 선배의 결심으로 모든 작업은 순탄하게 진행됐다.
 

드디어 탄생한 전국언론노조연맹
 
마침내 운명의 10월 29일 새벽 우리들은 삼삼오오 YMCA 친교실로 모여들었다. 편집국 내에서도 은밀히 작업이 추진됐기 때문에 그날 핵심 인사들은 대강 누구누구가 나타날지 알고 있었지만 나머지 인사들은 현장에서야 서로 “형도 나왔네. 반갑습니다”라는 식의 인사를 하며 부둥켜안고 동지애를 다졌다.

나의 사회로 노조 결성식은 속전속결로 진행됐고 우린 그날 오전 업무가 개시되자마자 종로구청 사회과로 달려가 노조설립신고서를 제출했다. 이로서 한국 언론노조사에 기록될 한국일보 노동조합은 마침내 첫 고고지성을 울렸다. 참고로 초대 노조위원장직을 고사했던 조성호 선배는 결국 최해운 씨에 이어 제2대 한국일보 노동조합위원장을 맡았다.

우리가 주축이 되어 1980년대 이후 언론사로서는 최초로 노동조합을 결성한 후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눈치를 보던 여타 언론사들도 용기를 얻어 잇달아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한국일보보다 약간 늦게 동아일보가 노조를 만들었고, 이어 중앙이보, 조선일보 등 신문사들도 노조를 만든데 이어 한국방송공사(KBS)과 문화방송(MBC) 등 방송사들도 노조를 결성했다. 이들 중앙 언론사 노조들은 처음 언론노조협의회라는 협의체를 만들었다가 다음 해 연맹결사체인 전국언론노조연맹을 결성해 명실 공히 법적 지위를 완벽하게 획득하게 됐다.
 

한국일보 노동조합위원장이 되다!
 
한국일보는 노조를 처음 결성했다는 자부심으로 자치 타칭 ‘선봉노조’라는 타이틀로 맹렬히 활약했다. 편집제작평의회라는 기구를 노사협의체로 만들어 편집간부와 사주들이 맘대로 편집방향과 논조를 결정하던 관행을 타파해나갔고 기자들의 열악한 근무환경을 개선하는 토대도 마련했다. 이에 따라 ‘사주와 선배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형태로 진행되던 편집국회의도 크게 탈바꿈했고 회사의 분위기도 나날이 민주적 협의체로 변모해나갔다. 매년 1기씩 공채를 통해 신입기자를 선발하는 독특한 견습 기자체가 정착된 한국일보 분위기에 걸맞게 노동조합 위원장도 매년 1기씩을 물려가며 맡는 관행도 정착했다.

나는 노조 설립을 주도했다는 ‘원죄’로 인해 회사로부터 수차례에 걸친 인사 불이익을 받았으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노조활동에 못지않게 취재활동에도 전력을 다했다. 그 덕분에 동기생들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는 경력을 쌓으며 초년 기자시절을 지낼 수 있었다. 회사로서도 ‘노조일군’인 내가 무능한 기자였다면 얼마든지 내칠 수 있었으나 선후배로부터 두루 신망을 받는데다 일도 제법 잘하자 노골적으로 인사 조치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나는 초대 노조에서 쟁의부장을 맡은 이래 거의 빠짐없이 노동조합 간부를 맡아 기자와 노조간부라는 두 가지 직분에 충실했다.

그렇게 7년이 흐른 1994년 가을, 마침내 내게도 ‘노동조합위원장’이라는 ‘독배’를 마셔야만 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1년 선배 기수인 이유식 씨(현 한국일보 논설위원)의 위원장 임기가 끝나가자 자연스레 우리 견습 기수가 노조위원장을 맡아야 했던 것이다. 우리 기수는 수차례 모여 숙의에 숙의를 거듭했다.

노동조합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만큼 이젠 취재현장에서 보다 더 많은 역량을 발휘에 보고 싶은 열망이 컸던 나는 내심 다른 동기생이 위원장을 맡아주길 바랬다. 하지만 동기생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워 모두들 고사했다. 이럴 땐 성질 급한 사람이 결국 진다던가? 1주일여를 논의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자 결국 “그러면 맡겠다”며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1994년 10월 한국일보 제8대 노동조합위원장을 맡았다. 아울러 신문사 노조 인 전국언론조동조합 수석부위원장도 겸직하게 됐다.

나는 전국언론노조 위원장인 이형모 선배(전 KBS 부사장)를 모시고 성실하게 활동했다. 이 기간에 나는 이 위원장과 함께 언론노조의 기관지였던 ‘언론노보’외에 본격적인 미디어 비평지를 만들기로 의견을 모으고, 그해 마침내 오늘날 국내 유일의 미디어 비평 주간지인 ‘미디어 오늘’을 창간하기도 했다.

지금도 내가 씨를 뿌려 키워낸 ‘미디어 오늘’이 언론민주화의 견인차이자 충실한 미디어비평지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을 보면 뿌듯하기 그지없다.

'내가 걸어온 길 > 언론인 윤승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5공 시절의 보도지침  (0) 2012.02.13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0) 2012.02.13
옳은 길을 회피하지 말라  (0) 2012.02.13
내 인생으로 들어온 언론  (0) 2012.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