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걸어온 길/언론인 윤승용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배의 제안을 받은 후, 나는 얼마 동안 진로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막연하게 생각했던 길, 그리고 대학에 들어와서 선배들과 함께 학보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뛰었던 것들, 여러 가지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제대로 된 기자가 되어 바른 언론인이 되자는 것이 나의 소신이었다.
 

드디어 언론인의 길에 들어서다!
 
당시 대학 동료 2명(노창준, 양재원)과 함께 신림사거리에서 ‘오월서점’이란 사회과학서점을 운영 중이던 나는 서가 한구석에 꽂혀 있던 ‘상식백과’와 ‘언론사 시험 기출문제집’을 가지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언론사 시험 준비에 나선 것이다.

한 두어 달여 준비를 하고 있던 중 1985년 2월쯤 조선일보와 한국일보가 견습 기자를 뽑는다고 사고를 냈다. 그런데 필기 시험일자가 같은 날이어서 나는 어느 신물을 볼지 고민하다 한국일보를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일보는 신문의 색깔이 보수일변도여서 영 마음이 내키지 않은데다 당시 학내 시위전력이 있는 응시생은 필기시험에 합격한다고 해도 신원조회에서 떨어뜨린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훗날 1988년 노태우 정부 들어 열린 청문회에서 사실로 판명됐다. 게다가 이름만 들어도 아는 정도였지만 내 고등학교 선배 언론인 중에는 유난히도 한국일보 출신이 많았다. 당시 소장·중견 정치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조세형, 박실, 임방현 선배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겨우 상식백과 책이나 들척이고 기출 문제집을 둘러본 나는 시험장에 가서 깜짝 놀랐다. 서울 대광고등학교에서 치러진 시험장에 갔더니 불과 10명을 뽑는 시험에 2,000명이 넘는 응시생이 몰려온 것이다.

무려 200 대 1이 넘는 경쟁률이었다. 더구나 학교에서 공공연하게 ‘언론사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몰려다니며 공부하던 모범생들 얼굴도 많이 보였다. 나는 바짝 기가 죽었지만 상식, 영어, 작문 등 3개 과목 중 어느 것도 다른 친구들에 비해 뒤지지 않을 것이란 막연한 자신감을 갖고 시험에 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자신감이었지만 “명색이 미 8군에서 3년을 근무하고, 국문과를 나온 데다 평소 신문을 열심히 봐오던 터여서 상식에는 막힘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난 한국일보 견습 43기에 합격, 1985년 4월 1일부터 한국일보 기자가 됐다. 기자 첫날 친한 친구들에게 “나 오늘부터 한국일보 기자로 출근을 시작했다”고 전화하자 친구들은 “오늘이 만우절인데 웬 거짓말이냐”며 믿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나의 21년에 걸친 얼론인 생활은 시작되었다.
 

나의 ‘빽’은 오직 ‘나’
 
한국일보에 입사해서 사회부에 배치돼 6개월간의 견습 기자 생활을 할 때였다. 당시 견습 기자들은 밤이면 1진기자로 불리는 사수와 함께 야근을 돌아야만 했다. 야근을 서울 시내를 동서 두방향으로 나누어 주로 큰 병원 응급실과 영안실에 살인이나 상해사건으로 입원한 사람이 없는지 체크하고 주요 포스트 경찰서 당직실을 돌며 야간 사건 발생 여부룰 확인하는 게 업무였다.

신입 기자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사회부로 배치 받은 4월 중순 어느 날, 하루는 같이 야근을 돌던 선배가 평소의 코스를 벗어나 강서구 개봉동에 있는 강서병원이라는 작은 병원으로 가는 것이었다.

요란한 무전송신용 안테나로 위용을 갖춘 야근차량(당시는 무선전화는 물론 삐삐라 불리는 페이저도 없던 시절이어서 급한 사안은 회사와 직접 연결되는 무전기를 이용해야 했기에 차량 뒤편에 커다란 안테나를 달고 다녔고 이 안테나와 비상라이트는 신문사 사건차량이 위용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다)의 조수석에 타고 있던 이 선배는 “어이, 윤승용. 너 전주고등학교 나왔지? 지금 네 고등학교 선배가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는 병원에 문병 가는 길이니 가거들랑 인사나 잘해라”라고 말했다.

명색이 기자라는 명함을 받긴 했으나 매일 경찰서 숙직실 등에서 기식하며 지내다 겨우 주말에야 한 번씩 회의참석 차 회사에 들어가는 견습 기자 신분이어서 도대체 회사에 고교 선배가 누가 있는지 알 수조차 없던 터라 일단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입원실에 들어서니 한 사람이 전신을 붕대로 싸맨 채 누워 있었다. 나랑 동행한 선배는 입원중인 선배와 몇 마디 회사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담배를 태우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

“이번에 입사한 43기 윤승용입니다. 저도 전주고등학교 53회입니다.”
나는 이 틈을 타서 그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선배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축하하네. 열심히 하게나.”
그는 내 손을 맞잡으며 반가운 내색을 하고는 한마디를 덧 붙였다.
“어이 윤 후배, 신문사 생활은 적자생존의 정글이네. 무조건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네. 그리고 한 가지 더, 회사에는 자네 빽은 내가 아니라네. 자네 빽은 바로 자네 자신밖에 없다는 점을 명심하고 살아가면 반드시 성공할 걸세.”

나는 입원실을 나오면서 ‘뭐 이런 선배가 있나. 처음 보는 후배에게 너무하는 거 아니야?’라며 섭섭한 심정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내 빽은 나밖에 없다’라는 그 선배의 지침은 가르침을 이행하느라 애를 썼다. 그 결과 나는 어느 정도 성공한 언론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 선배는 한국일보 정치부장과 편집국장을 마치고 현재는 대통합신당 서울강북을 최규식 국회의원이다.
 

촌지 200% 활용법?
 
기자가 되고 맨 처음 닥친 고민은 촌지 문제였다. 6개월의 견습 기자 생활을 마치고 그해 가을 정식 기자가 돼서 사회부로 발령을 받았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지만 대기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부에서 사건기자(이른바 경찰기자)로 최소 2~3년은 맹훈련을 받아야 하는 게 필수코스였다. 특히나 유난히 사건기사에 강하기로 소문난 한국일보에서는 사회부 사쯔마와리(경찰기자를 일컫는 일본식 언론 용어)에서 경력을 쌓기를 희망했다. 나는 견습 기간 중 나름대로 열심히 한 덕에 10명의 동기생 중 5명이 뽑힌 경찰기자에 낄 수 있었다.

당시 견습 동기생들은 지금 생각해 보면, 매우 쟁쟁한 멤버였다. 현재 정진석 국회의원,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 정몽준 의원 보좌관인 정광철, 국제문제시사평론가 이장훈, 이창민 뉴시스 편집국장, 백영철 세계일보 편집국장, 한국일보 황영식 논설위원, 사업을 하는 유영환, 박성현 등이 바로 그들이다.

견습 딱지를 뗀 정식 기사가 됐으면 기자실을 출입할 수 있는 이른바 1진기자 신분은 1년여가 더 지난 1986년 6월쯤 서울 서대문경찰서에 배치 받으면서 비로소 될 수 있었다. 1진기자가 된다는 것은 회사에서 운전기사와 함께 배차하는 취재차량을 단독으로 탈 수 있다는 점과 요즘 문제가 되는 기자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신분상으로 2진기자와는 천양지차였다.

사실 당시 분위기에선 2진기자는 특별한 심부름이 있거나 1진기자가 긴급한 사안으로 호출할 때를 제외하고는 출입할 수 없는 ‘금단구역’이었다. 꿈에는 그리던 기자실에 출입한 지 한달 쯤 되자 기자실 간사가 찾아왔다.
“저녁에 회의가 있으니 기자실로 모이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의 말대로 해질 녘 기자실에 들어섰고, 그러자 간사가 하얀 봉투를 건네줬다.
‘여름 휴가비’라며.

나는 속으로 ‘아 바로 이게 촌지로구나’라고 생각하며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난 기자가 되기 전에 어떤 일이 있어도 부정한 돈은 받지 않겠다고 결심하던 터였다. 그리고 그 이전에 사적인 인터뷰 등을 마친 후 취재원이 내미는 봉투는 철저하게 거절해왔었다.

“다들 받았으니 알아서 하세요.”
간사는 기자실의 내 사물함에 봉투를 던져 넣었다. 그 후 회사로 돌아와 대학동기이지만 나보다 먼저 입사한 친구에게 이 문제를 상의했다. 그 친구는 방긋이 웃으며 말했다.

“어짜피 네가 안 받으면 그 돈을 누군가 도 나눠가질 터이니 받아서 좋은 데 쓰면 될 것 아니겠어? 운전기사들 밥도 사주고 아직 취직 못한 친구들에게 베풀면 되잖아.”
나는 순간적인 갈등에 휩싸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 기자실에 들러 사물함을 열어보니 그 봉투가 그대로 있었고 나는 다시 고민했다.
‘아, 이상투를 어찌할 것인가?’
‘아직도 학생운동을 하다 수배 중인 친구나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면 될 거 아닌가?’
나는 고뇌에 고뇌를 거듭하다 그 봉투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난 그 봉투의 돈 가운데 취재를 위해 꼭 필요한 실비를 제외하곤(당시는 취재비 등이 열악해서 회사의 취재비로는 택시비, 밥값 등을 다 벌충하기가 어려웠다) 차곡차곡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다 돈이 적당한 규모가 되면 각종 시국사건으로 수배중인 동료·후배들을 만나 건네줬다. 경찰이 준돈을 경찰에 쫓기는 수배자에게 ‘도피자금’으로 대준 셈이다.

그 후로도 난 기자실 간사가 주는 공식촌지는 모았다가 재야운동을 하는 후배들의 생활비나 활동자금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같은 고민은 공식 촌지가 없어진 김대중 정부에 들어설 때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지금에야 하는 고백이지만 촌지 중 일부는 한겨레신문이 창간할 대 창간주주성금으로 납입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