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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걸어온 길/언론인 윤승용

5공 시절의 보도지침


 
<5공 시절의 보도지침>
 
지금 되돌아보면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의 언론은 사실상 언론이 아니었다. 방송은 매일 저녁9시만 되면 매일 첫머리에 전두환 대통령의 동정을 보도하는게 관례였다. 이른바 ‘땡전 뉴스’란 게 바로 이를 말한다. 9시 시보가 ‘땡’하고 울리면 이어 곧바로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로 시작되는 뉴스가 1년 365일 반복됐기 때문이다.
 

군사정권에 부딪힌 언론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용비어천가는 신문도 못지않았다. 모든 신문의 1면에는 대통령의 그날 행사 관련 사진이 들어가는게 원칙이었던 것이다. 공보처와 안기부 등에서 수시로 편집 간부에게 전화를 걸어 정권에 도움이 되는 기사는 크게 다루고 정권을 비판하는 기사는 아예 빼거나 눈에 보이지 않게 조그맣게 다루도록 지시했다. 정부기관이 편집권을 능소능대로 행사되던 소위 ‘보도지침’이란 것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언론을 통해 사회변혁을 꾀해보겠노라고 야심만만하게 시작한 기자생활에 회의가 들었지만 사내에 언론민주화에 뜻을 같이하는 동료·선후배가 의외로 많은 것을 알고 힘을 얻게 됐다.

당시 한국일보에는 군사정권의 폭악과 언론계가 처한 비민주적 현실에 불만을 갖고 있던 ‘꾼’들이 상당수 포진하고 있었다. 특히 유신 치하인 1974년 우리 언론사상 처음으로 합법적 언론노조를 만든 선배들과 1980년 신군부 치하에서 언론자유화 투쟁을 하다 고통을 겪은 선배들이 일부 남아 있었다.
우리는 조성호(현 지역신문발전위 위원장), 최해운(전 뉴시스 사장), 남영진(현 신문발전위원회 사무국장) 선배 등과 어울려 이런저런 모임을 가장해 수시로 인사동과 청진동 골목의 허름한 밥집에 모여 밤새워 시국에 대한 타개책을 논의하고 통음했다. 정말로 힘든 시절이었다.

이 같은 암중모색은 1986년 9월 터져 나온 ‘보도지침’사건을 계기로 큰 전환점을 맞게 됐다.
요즘 언론학도들은 도대체 무슨 사건인지조차도 모르는 보도지침사건(한국일보 정치부장 시절 새로 입사한 견습 기자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10여 명의 견습기자 중 보도지침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불과 1명에 지나지 않아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에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가 주역으로 연루돼 서울 마포경찰서에 구속된 것이다.

보도지침사건을 경향신문의 보도를 인용해 간추린다.
1986년 9월 6일 발간된 ‘말’은 ‘보도지침’ 특집호였다. 이는 당시 우리 언론이 처한 현실을 구구한 설명 없이 일거에 웅변해준 것이었다. 정부의 언론통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나 그 정도가 어떠했는지는 당사자 이외에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5공 청와대는 문화공보부(문공부, 현 문화관광부) 내 홍보조정실을 창구로 해 매일 각 신문사로 이른바 보도지침(문공부 용어로는 홍보조정지침)을 내려 보냈다. 일종의 보도통제 일일지침이었다. 이 지침은 주로 전화로 이루어졌다.

‘말’의 보도지침 특집호는 85년 10월 19일부터 86년 8월 8일까지 약 10개월간 문공부가 하달한 보도지침을 수록했다. 국내외의 주요 사건에 대해 보도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서부터, 보도한다면 그 방향과 내용, 심지어 형식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 지시하고 있는 보도지침은 참으로 세밀하고도 철저하고 친절한 것이었다.

“담배 수입,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쓸 것”, “야당 질문내용은 빼고 ‘그저 했다’라고만 보도할 것”, “고문관계는 오늘도 일체 쓰지 말 것”, “부천서 성고문사건은 ‘부천사건’으로 쓰라”, “농촌 파멸 직전 표현 쓰지 말 것”등에서 보는 것처럼 보도통제만 한 것이 아니라 기사의 내용을 유도하는 것이 많았다. ‘눈에 띄게’,‘크지 않게’, ‘돋보이게’, ‘균형 있게’등의 세세한 표현도 자주 등장했다.

독재체제에서 여론이 권력에 의해 어떻게 조작되고 유포되는지 소름이 끼치도록 선명하게 보여준 보도지침 특집호는 배포되자마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국은 즉각 전담반을 구성하고 수사에 나섰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 사무실과 ‘말’ 편집실을 수색해 ‘말’ 보관본과 특집호를 대량으로 압수했다. 당연히 관련자들은 구속을 피해 잠행에 들어갔으며 이들 모두에게 수배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보도지침 특집호는 날개가 돋친 듯 팔려 나갔다. 당시 언론 현실이 얼마나 참담했는지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보도지침 사례를 보자.

◆85년 10월 26일=‘국회의원 미행 도청 말라’ 보도하지 말 것. 국회 야당의원 보좌관 3명 검찰 소환으로 국회 유회 공전된 것은 스트레이트 3~4단으로 보도. 스케치 기사는 안 되고 해설 박스기사는 좋음. 야당 의원 의사진행, 신상 발언 등을 모은 박스기사 보도하지 말 것. 이재형 국회의장 ‘정부는 국회의원 미행 도청 잠복하지 말라’는 표현은 보도 말 것.
◆11월 4일=NCC 고문대책위 구성 보도 말 것.
◆11월 5일=국회 내무위에서 전경환 새마을중앙회장이 학생들의 화염병 투척사건을 보고하고 질의에 답변한 내용은 보도하지 말 것. 서울시경, 오늘 6시 주한상공회의소 학생 난입사건의 처리방침 발표 예정. 사회면 톱이나 중간 톱으로 다루지 않기를. 사이드 톱 정도가 좋다고 판단. 오늘 산발적 학생시위 일일이 떼지 말고 묶어서 크지 않게 보도.
◆11월 18일=학생시위 ‘적군파식 모방’으로 쓸 것. 대학생들 민정당사 난입사건은 사회면에 다루되 비판적 시각으로 할 것. 구호나 격렬한 플래카드 사진 피할 것. 치안본부 발표 ‘최근 학생시위 적군파식 모방’ 발표문은 크게 하되 ‘적군파식 수법’이라는 제목으로 뽑을 것.
◆12월 2일=예산안 변칙통과 책임은 야당에 있다. 국회 여단독으로 예산안 통과 관련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제작 바람. 여당은 정치의안과 예산안을 일괄타결하려 했으나 야측, 특히 김대중의 반대로 결렬됐음. ‘변칙 날치기통과’ 라고 하지 말고 ‘여 단독처리 강행’ 식으로 할 것.
◆12월 19일=김근태 첫 공판 스케치 기사나 사진 쓰지 말고 공판사실만 1단으로 할 것. 국회 폐회 후 정국 전망 중 제목으로 ‘장외대결’등 표현 쓰지 말 것.
◆86년 1월 15일=민정 창당대회 대통령 치사 1면 톱기사로. 이원홍 문공장관 저작권관련 발표문 크게 보도. 신민 의원 기소. 스케치 기사 여러 면에 벌이지 말고 가십으로 처리할 것. 기소 결정이 고위층과 연결된 인상 주지 말 것.
◆3월 31일=고대 교수들 개헌지지 성명 사회면 1단으로. 정동성 민정 의원 국회 질의 중 ‘광주 개헌현판식 사태 신민당이 군중 선동, 김영삼 김대중 야욕 버려야’ 발언은 눈에 띄게.
◆4월 28일=금일부터 KBS 시청료 거부 관계 기사 및 KBS라는 표현도 일체 쓰지 말 것. 야권 지도자 회의 사진 싣지 말고 1면 톱으로 처리하지 말 것.
◆7월 17일=성고문사건 검찰 조사결과 발표 내용만 쓰고 시중에 나도는 반체제 측 고소장 내용 일체 보도하지 말 것. 발표 이외 독자적 취재는 불가.
◆7월 27일=삼척탄광 광부들 집단행동은 사회불안 요인이므로 일체 보도 말도록. 미 국무성 ‘성고문사건에 개탄 표명’ 보도하지 말 것.

‘말’의 보도지침 특집호는 독립기념관 원형극장 시설이 모두 일제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사전에 담당 기자들에게 양해를 구했으므로 싣지 말라는 1986년 8월 8일자 지침을 마지막으로 끝난다. 이 특집호를 읽은 독자들은 그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그동안 언론이 이를 얼마나 충실히 이행했는지를 확인하고 경악했다.

그러면 정권과 신문사 사이에 오간 이 비밀문건은 어떻게 세상 속으로 걸어 나왔을까. 당시 한국일보 기자 김주언(현 한국언론재단 이사)은 옆자리의 편집국장이 어디서인가 걸려오는 전화 내용을 받아 적어 차곡차곡 모아두는 곳을 몰래 눈여겨보았다. 국장이 자리에 없는 날에는 자신이 직접 받아 적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신문사 내에는 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치안본부(경찰청), 문공부 등에서 나온 언론 담당 관련자들이 있었으므로 직접 말로 오고가기도 했지만 정리되기로는 문공부 홍보조정실 지침이 으뜸이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젊은 기자들 사이에 보도지침의 실상을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비밀스러운 동조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을 감지한 김주언은 국장이 지침을 받아쓴 후 모아둔 것을 모두 복사했다. 그런 후에 대학 동기로 민통련에서 일하고 있는 김도연과 민언협의 이석원 등과 의논한 후 가장 폭발력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합의했다. 김도연 등은 민통련 부의장인 홍제동성당 신부 김승훈,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바 있고 제12대 국회에 진입해 있는 이철 등과 접촉했다. 그러나 신부와 야당 의원을 통한 폭로보다는 역시 언론인 단체를 통한 방법을 택했다.

민언협 사무국장 김태홍(현 열린우리당 의원)은 여러 회원들과 함께 비밀 편집실에 틀어박혀 작업에 들어갔고 이내 책자로 찍혀 나왔다. 김주언은 보도지침 특집호가 출간된 이후에도 시치미를 딱 떼고 정상적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김태홍과 신홍범(민언협 실행위원)이 체포된 이후 그도 집 앞 출근길에서 붙잡혔다. 검찰과 사법부는 이들 3인에게 황당하게도 국가보안법 등을 적용해 구속했다. 침묵하는 국내 언론을 비웃듯이 미국·캐나다 등 각국과 앰네스티 등 국제단체에서 항의와 비난이 빗발쳤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야 할’ 사법부는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고민하다가 1995년에 이르러서야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이들에게 무죄를 확정했다.

보도지침사건은 “전두환 정권이 이 나라 최고의 범죄집단”(김태홍의 법정진술)이며, “인간의 이성이 잠든 25시보다 더욱 절망적인 언론의 26시”(신홍범의 법정진술)임을 스스로 입증한 사건이다. 보도지침이 가장 많이 내려진 대상이 민주화운동 관련으로 전체 688건 중 24.6%인 169건을 차지한 것을 보면 전두환 정권이 얼마나 민주화운동을 두려워하고 적대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나치 독일의 선전계몽부 장관 괴벨스가 구사한 언론통제정책은 나치의 일방적 주장을 반복하고 보도와 선전 내용을 규제하는 데 집중됐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패전 직전까지도 철저히 보도금지를 관철함으로써 자국과 식민지의 청년들을 죽음의 나락으로 내몰 수 있었다. 5공의 보도지침은 외국 파시즘 정권의 이 같은 언론통제전략을 유감없이 모방했다.

친일과 독재에 협력한 대가로 오늘날 천문학적 부를 축적한 언론사들이 민족지 운운하는 것은 천지신명이 분노할 짓이다. 한국 언론사에 영광이 있다면 이는 신산과 고초를 겪은 일선 기자들의 것이다.
-경향신문 2004년 7월 26일자, ⌜실록 민주화운동: ‘말’의 보도지침 폭로⌟
 

언론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
 
편집국의 뜻있는 기자들은 김주언 기자에게 면회를 다녀올 때마다 따로 만나 김 기자의 언론자유에 대한 의지를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를 깊이 있게 논의했다. 당시는 노동조합이 설립되기 이전이어서 기자들만의 편의기구인 기자협회 한국일보 분회를 중심으로 이 같은 논의가 진행됐다.

해가 바뀌어 이른바 민주화대투쟁의 해인 1987년에 접어들면서 정국의 요동과 더불어 신문사의 의식 있는 기자들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우리들은 각 기수별·부서별 소모임을 만들어 꾸준히 언론민주화의 방법들에 대해 논의했다. 마침내 민중의 거대한 힘에 밀려 제5공화국 정군은 ‘6·29선언’을 통해 사실상 항복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사회 각 분야, 특히 노동분야도 봇물처럼 민주노조 창립과 어용노조 탈피운동을 벌여나가기 시작했다.

한국일보 기자들도 기자협회 분회를 주축으로 움직이던 일파들은 많은 논쟁 끝에 법률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친목기구인 기자협회 대신 법적 기구인 노동조합을 만드는 게 유일한 대안이라는 데 견해를 같이했다. 이 모임은 당연히 소장 기자들이 주축이 됐다. 현재 한국일보 논설위원인 이계성, 황영식, 이유식 등과 나, 김주언, 남영진, 현재 사업을 하는 원인성 등은 비밀리에 회동하며 노동조합 결성을 취한 실무 작업에 들어갔다.

매일 취재 현장을 누비다가 저녁만 되면 우리들은 회사 앞 수송동의 밥집에 모여 역할을 분담했다. 나는 초대 위원장 선임 및 노동조합설립 절차, 그리고 노조결성식을 위한 장소 물색 역할을 맡았다. 이 과정에서 대학 시절 노동현장에 ‘위장취업’하기 위해 준비했던 각종 노동법 공부가 큰 도움이 됐다. 당시로서는 현 내일신문 사장인 장명국 선배 부부가 펴낸 ‘노동법해설’이 노조경성과 단체교섭, 단체행동 등에 대한 유일무이한 교과서나 다름없었는데 난 졸업을 앞두고 이를 서너번이나 이미 독파한 터였다. 때문에 자연히 노동조합 결성 실무에서 중심 역할을 자의반 타의반 맡을 수밖에 없었다.

나를 중심으로 한 소장파들은 초대 노조위원장 후보군을 물색하다 언론민주화에 대한 의지가 투철하고 뚝심과 돌파력을 겸비한 데다 후배들에게 두루 신망이 높은 조성호 선배(현재 지역신문발전위원장, 당시 차장)로 후보를 압축했다. 하지만 집단해고를 당하는 등의 선례가 있어서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 자체가 엄청난 독립운동을 하는 듯한 결기가 필요한 시절이었다.

유신 치하의 언론 노동조합들은 이미‘동아, 조선 강제해직사태’와 ‘동아투위, ’조선투위‘ 등으로 잘 알려진 바대로 대량 탄압을 받은 전력이 있었다. 이 때문에 노조결성 작업을 하면서도 우리는 회사와 정부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설왕설래가 많았다. 노조 결성을 하자마자 회사가 즉각 노조 간부들을 집단 해고할 것이라는 험악한 전망마저도 나오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