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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걸어온 길/언론인 윤승용

옳은 길을 회피하지 말라


 
<옳은 길을 회피하지 말라>
 
나는 말미를 얻은 이틀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당시 나의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은 고등학교 시절의 은사이신 공의창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고교 1학년 때 담임이셨던 공 선생님은 항상 우리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던 것이다.
결국 나는 “함께 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로부터 1주일여 후 나는 신림동 사거리 근처에서 한 선배로부터 두툼한 크기의 유인물 뭉치를 받았다. “학내에서 유인물을 뿌리기로 했는데 너는 인문·사회대쪽에서는 문제학생으로 얼굴이 많이 알려져 위험하니 자연대와 공대 쪽에 살포하라”는 말과 함께...
 

지긋지긋한 유신의 끝
 
나는 그 유인물을 가방에 담아 좌석버스를 타고 학교에 들어간 다음 자연대와 공대의 빈 강의실, 실험실, 그리고 휴게실 등에 몰래 뿌렸다. 당시 경찰의 감시를 피해(당시는 사복 경찰들이 학교에 시글시글 상주하던 때였다) 빈 대형 강의실에 수업 시작 전에 들어가 미리 유인물을 놓아두고 돌아나오던 그 복도가 왜 그리도 길고도 멀었었는지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우린 보름에 한 번씩 이 작업을 계속했으나 단 한 명도 경찰의 단속망에 걸리지 않았다. 사전답사를 치밀하게 하는 등 매우 정교하게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하신문 살포사업은 채 두 달도 넘기지 못한 채 엉뚱한 데서 불거진 사건으로 막을 내려야 했다.

나중에 수사과정에 드러났지만 당시 서울대 학생운동권 지도부는 크게 3파트로 나눠져 있었다. 이른바 CT(컨트롤타워)로 불리는 최고 중심축을 가운데로 학내 시위 담당조, 학내 유인물조 및 학 외 유인물조로 구성돼 있었던 것이다. 이 가운데 학 외 유인물조는 별도로 맹렬히 가동 중이었는데 이들이 영등포 연흥극장에서 유인물을 뿌리다 경찰에 잡혀버렸던 것이다. 역시 지양멤버인 김윤태 등이 바로 그들인데 이로 인해 서울대 치대 전동균 선배(현재 치과의사) 등이 이끄는 학외 유인물조가 일망타진됐다. 이들은 당시 전국을 초긴장상태로 몰아 넣은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과 연루시키기 위한 경찰의 모진 고문에 못이겨 결국 학내 유인물조와의 연결고리인 한 선배를 진솔해버렸던 것이다.

이 때문에 조직 자체가 점조직 형태여서 우리끼리도 서로 잘 모르던 학내 유인물조의 전모가 드러났다. 나중에 확인됐지만 학내 유인물조는 한철희, 고세현, 박일용 등에 유동환, 그리고 나 등이었다. 우리 모두는 10월 중순 전모가 드러나 모두 수배되거나 구속됐다. 하지만 나는 다행히 수배령이 떨어지던 날, 서울 남영동 작은 누님 댁에 들어가지 않는 바람에 구속은 면할 수 있었다. 구속은 면한 난 수배 상태에서 도피생활을 해야 했는데 이 생활동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부부장이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숨져 유신체제가 막을 내를 덕에 끝을 내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그 지긋지긋한 유신은 종말을 고했다.
 

역사와 우정, 그리고 언론에 대한 이해
 
그러나 나와 지하유인물의 인연은 그때 끝난 게 아니었다. 군대에 다녀와 1982년 가을에 복학한 나는 지리멸렬해진 학생운동권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히 고민했다. 당시 학생운동권은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이후 찾아온 1980년 ‘서울의 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 전두환 등 신군부의 집권을 저지하지 못했다. 신군부는 학생운동권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탄압했는데 이때 터져 나온 사건이 이른바 ‘무림사건’과 ‘학림사건’이었다.

1980년부터 1981년 사이에 잇달아 발생한 두 사건으로 서울대의 경우 많은 운동권 핵심 학생들이 강제징집을 당하거나 구속됐다. 학내 운동권을 양분하던 이른바 민족해방(NL)계열과 민증민주(PD)계열의 리더 그룹 대부분은 구속과 강제징집으로 거의 궤멸상태였던 것이다. 나는 한 학기가 지난 후 새로 복학한 과거의 동료들과 함께 구속과 강제징집을 피해 겨우 살아남아있던 후배들을 모아 조직재건에 나섰다. 때마침 정부는 1983년 말 ‘학원자율화조치’를 단행하며 다소 유화적 제스처를 폈다.

어쨌든 정부의 기만적인 정책이긴 했지만 학원자율화조치로 유신 말기와 1980년 서울의 봄 시절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에 연루돼 제적됐던 적지 않은 선배와 동료들이 복학해 학원으로 돌아왔다. 이들이 사실상 학생운동세력에 큰 힘이 됐음은 물론이다.

나는 복학생 그룹에 속해 조직재건작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재학생 그룹이 아무리 지리멸렬 상태라 하더라도 복학생들이 실질적 활동가 그룹의 전면에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평소 절친하게 움직이던 인문대 중심의 복학생 그룹은 재학생들에게 큰 틀에서 도움을 주는 일종의 고위 자문그룹 역할을 해주는 게 옳다는 데 견해를 일치했다. 당시 이 그룹은 윤석인(종교학과, 현재 희망제작소 부소장), 양재원(서양학과, 현 한국 소프트웨어공제조합 전무), 노창준(동양사학과, 현 바텍 대표이사), 그리고 나였다. 이들 중 윤석인이 모임을 총괄했고 양재원이 학내 재학생 중심 그룹을 맡고, 노창준은 학내 유인물팀을, 그리고 나는 학외 유인물팀을 이끌어 재학생 그룹을 이끌기로 합의했다.

5년 전 학외 유인물의 배달부 역할을 했던 내가 이제 또다시 학외 유인물팀의 총괄배후역을 맡게 된 셈이다. 당시 서울 시내 주요 대학에는 각각 별도의 학외 유인물팀이 가동 중이었는데 유인물 살포시 안전을 확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각 대학 팀들의 배달지역이 겹치지 않도록 조정하는 것이었다. 내가 맡은 일은 바로 이 역할이었다.
다른 대학과의 연계조직을 맡고 있던 윤석인이 다른 대학의 주간 배포일정을 확인해 오면 난 이를 토대로 내가 운영하던 5개 팀에게 그 주의 배포지역을 할당해줬다. 당시 나와 함께 학외 유인물을 살포하던 멤버들은 이젠 각각 법조계, 언론계, 학계 등에서 중견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들의 실명을 밝히고 싶지만 이에 대해 양해를 구하지 못해 알리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우린 약 1년간 이러한 배후 컨트롤 시스템을 운영했는데 1985년 초에 이르러서는 재학생 조직이 자율적으로 학내외 조직을 추스를 만한 역량을 쌓음에 따라 이 역할을 마감했다. 여기에는 내가 1985년 4월 한국일보 기자가 되어 ‘제도권 언론인’이 되고 함께 일했던 멤버들이 현장운동과 재야조직으로 각각 ‘존재이전’함으로써 일을 계속할 수 없었던 것도 한 이유가 됐다.

어쨌든 난 2번의 비합법 지하신문과 반합법 인문대 학보사기자 신분이라는 언론과의 모진 인연으로 학창 생활을 보낸 셈이다. 그러나 난 이 기간에 배운 역사와 우정, 그리고 언론의 엄중함에 대해 참으로 깊고 넓은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고 감히 자부했다.
 

기자의 꿈을 불태우다
 
언론인에 대한 꿈이 보다 구체화한 것은 대학 졸업을 앞둔 1984년 무렵이었다. 학생운동에 몰두해 있던 나는 졸업 이후의 진로를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당시 유행하던 이른바 ‘존재이전(당시 대학 졸업 이후의 진로 설정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의 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노동현장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요즘에는 벌써 까마득한 시절의 얘기처럼 들리지만 당시 운동권 대학생들은 학업을 중간에 그만두거나 졸업한 우에 구로공단이나 인천지역 쪽의 제조업체에 대학생 신분을 숨긴 채 취업해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이른반 위장취업이 바로 이것이다. 한 유력 대선 후보가 세금을 좀 덜 내고 생활비를 보전해주기 위해 자신의 빌딩관리회사에 이름만 올려놓고 급여를 주는 형식의 말도 안 되는 ‘위장취업’과는 천양지차인 운동방식이었다. 또 하나는 재야 및 시민단체(당시엔 이렇다 할 시민단체도 없었지만)에 몸을 담아 운동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어려운 집안 형편 등을 생각하면 당장 취직이라도 해야 할 형편이어서 두 가지 방식을 선뜻 선택할 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옳다고 믿고 생활해온 신념과 원칙에 비추어 선뜻 일반 사기업에 취직하는 것도 썩 마음이 내키진 않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운동과 생계를 함께 해결할 방책으로 당시 잊기를 끌던 ‘사회과학출판사로의 취직’을 차선책으로 고려하던 중 1984년 겨울 한 선배로부터 새로운 제안을 받았다.

이미 재야단체에서 상당한 직책을 맡고 있던 그 선배(현재해외에서 선교활동 중이다)는 내게 “운동조직의 올바른 노선확립을 위해선 정확하고도 치밀한 현실상황에 대한 분석이 필수적인데 운동권의 능력은 너무도 미약하다. 5공 정부의 정책과 한미관계 등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를 입수하려면 기자직이 최고다. 너는 여러 가지 조건을 놓고 볼 때 제법 기자적 자질이 있으니 언론계로 진출했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바로 이 사소한 제안이 나를 언론계로 유인한 결정적 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