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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로 본 세상이야기

바야흐로 신 보도지침 부활?




필자가 한국일보 햇병아리 기자시절이던 1980년대 중반의 일이다. 통상 신문제작을 위한 편집국 부장단회의는 아침, 점심 직후, 오후 초판 마감직전, 초판 발행 직후 등 매일 네 번씩 열린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회의는 초판 마감직전인 오후4시 회의다. 이 회의에서는 1면 톱기사를 비롯한 주요기사의 배치와 기사제목 등 매우 민감한 신문제작 기조가 결정된다.

그런데 이 회의 석상에서 당시 모 편집국장은 항상 이상한 메모지를 꺼내들고 신문제작방향을 결정했다. 그는 회의가 끝나면 그 메모지를 국장석 메모함에 이를 보관했다. 이 같은 관행이 지속되던 1985년 가을, 특집과학부의 김주언 기자가 이 메모지의 정체가 궁금해서 몰래 이를 훔쳐봤다. 메모지를 훔쳐보던 김 기자는 놀라움과 분노로 달아올랐다. 메모의 내용은 이런 식이었다.

쪾 85년 10월 26일 - ‘국회의원 미행 도청 말라’는 보도하지 말 것. 국회 야당의원 보좌관 3명 검찰 소환으로 국회 유회 공전된 것은 스트레이트 3~4단으로 보도. 스케치기사는 안 되고 해설 박스기사는 좋음. 야당 의원 의사진행, 신상발언 등을 모은 박스기사 보도하지 말 것. 정부는 국회의원 미행 도청 잠복하지 말라는 표현은 보도 말 것.
쪾 85년 11월 18일 - 학생시위 적군파식 모방으로 쓸 것. 대학생들 민정당사 난입사건은 사회면에 다루되 비판적 시각으로 할 것.

이 메모는 매일 외부에서 전화로 지시받은 ‘신문제작 방향 명령서’, 이름하여 ‘보도지침’이었던 것이다. 김 기자는 이 메모지의 전달경로를 조심스레 추적했다. 확인해보니 당시의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이 매일 각 언론사에 전화로 은밀하게 시달해오는 것으로 밝혀졌다. 메모지에는 뉴스의 비중이나 보도 가치에 관계없이 사건이나 상황, 사태의 보도여부는 물론 보도방향과 보도의 내용 및 형식까지 구체적으로 결정했다. 즉 보도 가(可), 불가(不可), 절대불가까지 결정해서 지침을 하달했을 뿐 아니라 어떤 기사를 어떤 내용으로 어느 면 어느 위치에 몇 단으로 싣고 제목도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하며 사진 사용 유무까지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김 기자는 이 메모지를 매일 국장 몰래 복사해서 모으기 시작했다. 김 기자는 1985년 10월부터 다음해 8월까지 이렇게 복사해서 모은 보도지침 584건을 당시의 김태홍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과 신홍범 실행위원에게 전달했다.
김태홍씨 등은 이를 당시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에서 발행하는 월간 ‘말’지의 <보도지침―권력과 언론의 음모>라는 제하의 특집기사를 통해 전격 폭로했다. 이를 계기로 정부가 은밀하게 언론을 통제해온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됐고 이는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한 기폭제로 작용했다.

최근 경찰이 서울시내 교통정보를 방송으로 내보내는 리포터들의 방송 멘트와 관련해 촛불집회를 불법집회로 표현해줄 것을 요구한 사실이 드러났다. 서울지방경찰청 6층 방송 리포터실 복도 게시판에 게시된 “등록금 관련 야간 촛불집회라는 표현을 그간 썼지만, 이제부터는 한대련 등 등록금 관련 야간 불법집회’라는 용어를 써주기 바랍니다”라는 글을 한 리포터가 사진과 함께 트위터에 공개해버린 것이다.

해당 안내문에는 “한대련 등 등록금 관련 야간 ‘불법집회’로 인해 어디 구간이 정체이니 어디로 우회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된 예문까지 덧붙여져 있었다. 물의가 일자 경찰은 방송 리포터들이 집회와 관련해 여러 가지 명칭을 쓰기에 통일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올린 게시물이라고 해명했지만 경찰청의 눈치를 봐야하는 리포터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상당한 압력이 담긴 ‘보도지침’이나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부들어 서민경제와 남북관계가 파탄난데 이어 민주주의마저 후퇴한다고들 하는데 이번 경찰의 어이없는 행태를 보면 과거 5공화국 시절의 보도지침사건이 떠올라 가슴이 씁쓸하기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