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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로 본 세상이야기

다시 개헌을 촉구한다


'박연차 게이트'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박연차라는 영남지역의 한 통 큰 기업인이 사업하면서 주변에 마구 돈을 뿌리고, 그 돈의 댓가로 다시 기업을 더 키운 과정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 세간에서는 요즘 박연차씨가 뿌린 검은 돈을 '연차수당'이라 희화화하며 그와 다소 안면이라도 있는 사람중에 돈을 못 받은 인사를 ''연차수당'도 받지 못한 '허당거사'라고 비아냥댄다고 한다. 실소를 금치 못할 노릇이다. 그의 이번 행각이 과거 한국의 재벌기업 총수들이 수백억원대의 뇌물을 '통치자금'이란 미명아래 대통령에게 청와대에서 직접 상납하고 대신 각종 사업적 특혜를 누린, 우리 기억에도 생생한 5공및 6공화국 비리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라 하겠지만 죄질로 보아서는 오십보 백보임에 틀림없다.

나는 이번 사건이 검찰수사로 하나씩 실체를 드러내는 것을 보며 참담한 심정을 금치 못하고 있다. 검찰의 수사가 정치보복적 먼지털이식 수사라는 일부의 비판 때문만은 아니다. 정경유착 탈피와 특권배제라는 도덕적 가치를 앞세워 집권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핵심 피의자로 몰리고 있기 때문이기도하다. 사법적 유죄 여부를 떠나 전직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으로 멀리 김해로부터 한양천리까지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노 전대통령 개인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일 터이다. 한때 그 분을 곁에서 보좌했던 필자로서도 유감스럽기는 매한가지다.

하지만 마냥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 같다"며 정치권을 싸잡아 욕지거리를 해댄다고 이번 사건의 근본원인이 뿌리뽑히는 것은 아니다. 우린 싫든 좋든 다시 선거로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을 뽑아야하며 그들이 다시 나라를 좌지우지 할 것이다. 때문에 우린 사태의 본질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번 사건의 원인은 여러 각도에서 그 배경을 살펴볼 수 있지만 대통령이라는 한 개인에게 너무 과도한 권력이 집중된 현재의 '5년단임 대통령중심제'라는 통치시스템에 가장 큰 이유가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이미 대통령제의 폐해에 대해서는 많은 인사들이 지적한 바 있다.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지난 해 11월 "세계화·정보화로 환경이 엄청나게 변화하고, 한편으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국가의 모든 운명을 한 사람에게 책임지우는 현재의 대통령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의회의 강력한 견제 없이 비상대권을 갖고 있고, 검찰·경찰·감사원에 대한 통제권을 가진 현 대통령제는 미국과 달리 권력이 집중화된 기형적 제도"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러한 제왕적 대통령은 결국 망명, 재임중 자식 구속, 임기 후 구속 등 자기파괴적 현상을 초래했다"며 "국가와 안보는 대통령이, 경제와 일반 행정 등 내치는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총리가 각각 나눠 맡는 '분권형 대통령제'가 국민 통합을 위해 바람직한 대안"이라고 말했다. 그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현재 OECD 국가중에 대통령제를 실시하는 나라는 미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더구나 한국처럼 사실상 제왕적 대통령이 군림하는 나라는 독재가 판치는 후진국에나 존재할 뿐 선진국중에는 사실상 없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 등 분권형대통령제를 실시하고 있다. 대통령 1인에게 통치권의 모든 것이 집중된 한국의 대통령제는 아무리 대통령 본인이 자제하고 조심한다고 해도 부패와 독직, 인사전횡의 적폐가 재발할 수 밖에 없음을 이번에 노 전 대통령이 여실히 보여주었다.

노 전대통령은 임기를 1년여 앞둔 2007년1월9일 '대통령 4년 중임제'를 내세운 원포인트 개헌을 제창했었다. 노 전 대통령은 ▲1987년 제정된 현행 헌법은 시대적 소명을 다했고▲국회의원 선거와의 주기차이로 인한 국정불안정 및 선거비용 과다▲단임제의 폐해 등을 내세워 정치권의 수용을 요구했다. 하지만 정치권, 특히 야당과 보수언론은 ▲정계개편과 정국주도권 장악을 위한 정략적 발상▲대선판도 개입의도설 등을 내세워 극력 반대했다. 결국 차기 정부 출범후 개헌논의를 한다는 정치권의 합의를 조건으로 노 전 대통령은 그해 4월14일 개헌안을 철회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당시의 약속을 팽개친 채 지난 1년을 허송했다. 이제라도 정치권은 당시의 약속을 지켜야한다. 내각제냐, 대통령 4년 중임제냐는 국민다수의 뜻에 따르면 될 일이다. 그 길만이 이번 사건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참 된 교훈이다./전북일보 5월20일자 칼럼